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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흑] FEVER

KRBS 2013.11.09 19:39

[황흑] FEVER

 

 올해 들어 가장 무더운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일기예보는 연일 최고 기온을 갱신하고 있다고 알리면서 외출 자제를 권고했다. 당연히 학교 분위기도 풀어질 대로 풀어져, 체육 수업은 물론이요, 평시 수업조차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 내내 축축 늘어져 있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좀비처럼 에어컨 앞에 찰싹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근성론과 정신론을 내세우는 운동부들도 한 발 물러서기 시작했다. 외부 경기인 축구, 야구부에서 더위 먹어 쓰러지는 선수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 특히 결정적이었다. 학부모 측으로부터 좀 심한 것 아니냐는 항의가 날아오자 학교에서 당분간은 연습을 자제하는 게 좋겠다는 통보가 내려왔다.

 

 실내 종목이라고는 하나 농구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식전이 얼마 안 남았고, 엄격한 선수관리와 연습량을 자랑하는 테이코 농구부라지만 2, 3군의 선수들이 하나 둘 지쳐서 이상 반응을 보이는데 계속 강행군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당분간은 다들 컨디션 관리에 집중하면서 푹 쉬도록. -해산."

 

 기온이 좀 떨어져 살만해질 때까지 연습을 쉬겠다는 요지를 담은 알림을 끝으로 아카시가 감독에게 보고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뒤에 남은 선수들 또한 그 뒤를 이어 하나 둘 체육관을 나가거나 삼삼오오 모여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니시무라인지 키타무라인지… 칫, 도움이 안 되네."

 

 아오미네가 쯧, 혀를 찼다. 날씨 좀 덥다고 쓰러지다니, 말이 되냐 그게. 한여름의 땡볕에서도 펄펄 나는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요즘 한창 제 플레이를 정교하게 갈고닦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는데 이런 제동이 걸리다니, 정말이지 민폐다.

 

 "다들 약골이 따로 없구만."

 "아니, 계속 했으면 1군에서도 쓰러지는 선수가 나왔을지 모른다는 거다."

 "미도리맛치 말이 맞슴다. 다들 아오미넷치처럼 무식하게 체력만 좋지는 않다고요."

 

 키세가 넉살 좋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체력이 좋다는 것까지는 좋지만, 쓸데없는 수식어가 앞에 붙자 아오미네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식하게, 라니."

 "신은 공평하다는 이야김다. 바보에게도 장점 한 가지 쯤은 있어야 하니까요."

 "뭐라고? 키세 이 자식, 말 다했냐!"

 

 아오미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농구공을 날렸지만, 키세는 여유만만하게 공을 받아냈다. 아직 1 on 1으로 이겨본 적은 없지만, 더는 1군에 갓 올라왔던 미숙한 그가 아니다.

 

 "적당히들 해두라는 거다."

 

 아오미네와 키세가 본격적으로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대기 시작하자 미도리마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이미 둘은 듣고 있지 않았다. 그러는 너는 얼굴 빼고 뭐가 잘났느니, 적어도 너보다 성적은 높다느니, 그 나이 먹고 나뭇가지와 지렁이를 착각해서 기겁하는 남중생은 너 하나뿐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유치한 대화가 이어지자 미도리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학교 2학년이라기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한심하군."

 "상관없지 않아? 쿠로칭은 저게 다 친해서 그런 거라던데."

 "저건 친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 연령의 문제… 그런데 무라사키바라, 지금 뭘 먹고 있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젓던 미도리마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무라사키바라가 들고 있는 흰색의 말랑말랑한 저것은-.

 

 "그건!"

 "으응?"

 "으응이 아냐, 으응이! 그건 오늘 내 럭키 아이템이다!"

 

 전통 있는 화과자 가게에서 100주년 기념으로 20세트 한정으로 판매한 흰 토끼 찹살떡. 세트당 1500엔이나 하는 그의 럭키 아이템이 무라사키바라의 입 안에서 살살 녹고 있었다.

 

 "아, 이거~? 맛있더라. 찹쌀 찰기도 적절하고 팥과 밤이 한 데 어우러진 앙금의 맛이 아주 절묘해. 미도칭도 먹을래?"

 "그러니까 그건 먹는 게 아닌 거다!"

 

 미도리마는 황급히 무라사키바라의 손에서 흰 토끼 찹쌀떡을 구출해냈지만- 때는 늦어있었다. 은은한 분홍빛 포장지에 둘러싸여 정갈하게 몸단장을 하고 있던 토끼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미도리마가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넋을 놓자, 어느새 입씨름을 멈춘 키세가 피식피식 웃었다.

 

 "미도리맛치, 고작해야 과자 가지고 흥분하다니, 아직 어리네요."

 "너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나참, 흥분할 거 없잖아? 과자야 다시 사면 되는 거고. "

 "그러니까-."

 "그보다, 쿠로콧치는 어딨슴까?"

 

 아오미네의 무신경한 말에 미도리마의 럭키 아이템 징징거림이 되풀이되기 전에 키세는 재빨리 화제를 돌려버렸다. 게다가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쿠로코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다른 사람들도 쿠로코가 없다는 데 눈치챈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어… 그러고보니 테츠가 안 보이네."

 "이런 한심한 대화에 참여할 이유가 없으니 먼저 돌아간 거겠지."

 "그러는 너야말로 그 한심한 대화 거들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

 "으음-  이상하다. 아까까지는 옆에 있었는데."

 "쿠로콧치… 경기 중이라면 모를까 일상생활에서 미스디렉션으로 사라지다니, 너무함다."

 

 그 특유의 흐릿한 존재감 덕분에 옆에 있어도 눈치채지 못한 경우는 많았지만, 지금처럼 실제로 휙 가버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인사도 없이 사라지다니 쿠로코가 별일이라고, 다들 의외라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

 

 몸이 무겁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쿠로코는 가볍게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었다. 특별히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니고, 단지 걷고 있을 따름인데 몸이 축축 늘어졌다. 이렇게 컨디션이 안 좋아진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잠시 더위를 먹은 것이니 알아서 낫겠거니, 하고 여겼는데 날이 갈수록 열이 오르는가 싶더니 간헐적인 기침마저 이어졌다. 더위인데 웬 기침인가 하고 당황한 것도 잠시,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여름감기인 모양이라고 깨달았다.

 

 의사선생님은 펄펄 끓는 바깥의 온도와 냉골이 따로 없는 실내의 온도 차 때문에 요즘엔 그런 사람 많다고, 네가 딱히 몸이 허약한 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30도를 훌쩍 넘기는 고온에 몇 시간씩 이어지는 연습도 거뜬히 해내는 사람을 알고 있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연습이 중단되어 다행이었다. 한심하게 여름감기에나 걸렸다는 걸 알리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감기약을 먹어서 기침은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격렬하게 운동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만약 오늘도 몸 상태를 숨기고 고강도 연습이 이어졌다면 중간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하지만 평상시에도….'

 

 냉정히 따지고 들어보면 컨디션 최고조일 때조차도 그는 체력이 썩 좋지 못하다. 1군 최약은 물론이고, 2군 밑변에조차 아슬아슬 걸릴지 의문이다. 연습이나 기초훈련을 하고 있노라면 늘 체력에 한계를 느꼈다. 토기가 밀려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어떻게하면 보다 체력을 기를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많이 먹으면 뭔가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하고 한동안 무리하게 과식을 시도한 적도 있지만 결국 다 토해냈다. 운동부는 고사하고 일반적인 성장기 남학생만큼도 잘 먹지 않는 그에게 갑자기 많은 양의 음식을 소화하는 건 무리였다.

 

 어떻게든 따라잡고 싶은데.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그림자'로서 자신의 '빛'은 물론이요, 다른 기적의 세대 모두를 보다 빛나게 하는 플레이를 하고 싶다. 그런데 현실을 어떻지. 매일 훈련에 따라가는 것도 겨우겨우인 데다 따라잡기는 고사하고 한 발 나아가려고 하면 그들은 어느새 저만치 가 있지 않나. 언젠가는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날이 올 지 모른다.

 

 -'그'와는 다르게.

 

 불현듯, 키세가 떠올랐다. 중2부터 농구를 시작했음에도 2주 만에 1군에 들어온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 매일같이 하는 아모미네와 1 on 1에서 아직 이겨본 적은 없지만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오미네의 발치에도 다가서기 힘든 쿠로코 자신과는 다르게 매일같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간다.

 

 새삼스레 재능의 유무를 탓하고 싶은 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늘지 않는 실력에 절망했던 적도 있었으나 그 단계는 이미 뛰어넘었다.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플레이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다만, 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가는 영영 뒤쳐져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마음 속 어딘가에서 그를 흔들고 있었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진다고 했으니 이 조급함은 아마 여름 감기 탓일지도 모르지만, 아예 없던 것이 불쑥 생겨난 것은 아니다. 평상시에는 누르고 있던 것이 뛰쳐나왔을 뿐. 

 

 "농구 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연습하고 싶다. 코트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농구공의 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보면 지금 자신은 더위를 먹은 게 아니라 감기에 걸린 거니까, 땀을 빼는 게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멍청한 생각도 들었다. 땀에 절어 가면 부모님이 타박할지 모르지만, 마침맞게 오늘부터 할머니를 모시고 효도관광을 가셨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예약해둔 것이고, 쿠로코 또한 감기 기운이 한풀 꺾여서 가도 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야외 농구 코트가… 이쪽이었지.'

 

 가만히 있어도 땀이 뚝뚝 떨어지는 무더운 날씨에 컨디션마저 난조. 이런 때 농구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상식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기실 지금 쿠로코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쿠로코는 우뚝 서서 집으로 가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부연 시야 너머로 하굣길에 종종 들렸던 코트로 가는 길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한걸음, 그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탕, 탕, 농구공이 규칙적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편의점에서 다른 팀메이트들과 헤어져 하교 중이던 키세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그 정겨운 소리에 자연스럽게 발이 멈췄다.  

 

 '헤에, 아오미넷치면 모를까 이런 날씨에 농구 연습임까….'

 

 감기 한 번 제대로 걸려본 적이 없다는 강철의 아오미네라면 이 무더위에도 연습할 수 있을 거 같지만, 솔직히 오늘같은 날씨는 그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버겁다. 연습하는 게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하다. 아니, 바보라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밀려들었다. 모처럼 모델 일도, 농구 연습도 오프인데 어디 구경이나 좀 하고 갈까.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면서 농구 코트로 향하는 길목으로 꺾어들어갔다. 조금 걷자 무성하게 우거진 관목 사이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도 매우 낯익은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라, 저건…."

 

 처음에는 잘못 본 게 아닐까 했다. 일찌감치 귀가한 그가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물며 아카시로부터 푹 쉬고 컨디션 조절 잘 하라는 말을 들은 뒤라면 더더욱. 하지만 코트 위를 달리며 공을 드리블하는, 저 작으면서도 늠름한 사람을 잘못 볼 리가 없다. 아오미네만큼은 아니어도 매일 패스를 주고받고 있으니까.

 

 "……쿠로콧치."

 

 황망한 마음에 작게 중얼거렸을 따름인데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쿠로코가 키세 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마주칠 거라고는 쿠로코도 생각지 못했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키세 군,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꺼질듯 연약한 목소리였다. 얼굴 또한 벌겋게 익어 땀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게, 어쩐지 평소보다 더 위태로워보였다.

 

 "뭐하는 검까, 오늘은 컨디션 관리하면서 푹 쉬라고 했던 거 벌써 잊었슴까?"

 

 꾸짖으면서도 키세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숨이 지나치게 거칠다. 원래부터가 저질 체력인 주제에 이런 땡볕에서 운동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지만, 어째 느낌이 좋지 않다.

 

 "쿠로콧치, 괜찮슴까? 좀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

 

 말이 끝나기도 전에 쿠로코가 쿨럭, 마른기침을 뱉으며 몸을 휘청거렸다. 괜찮다니, 지금 그게 괜찮은 거냐! 키세가 기막혀 하면서 달려가는 순간, 쿠로코의 시야는 암전되었다.

 

*

 

 문득,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

 

 여름 날에 말하기에는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따뜻하다. 그리고 묘하게 시원하기도 하다. 그리 생각하면서 쿠로코는 슬며시 눈을 떴다. 하늘은 어느새 해도 다 지고,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쿠로코는 새 한 마리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왜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지, 라는 지극히 당연한 의문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직 머릿속이 멍해서 뭐가 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쿠로코는 천천히 아까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았다. 오늘부터 당분간 농구 연습은 중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하교하다가 농구가 하고 싶어져서 근처 농구 코트를 향했다. 한참을 연습하다가 왠지 키세를 만났고, 그러다가-.

 

 "깼습니까?"

 "…키세 군."

 

 쿠로코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들자, 아직은 누워있는 게 낫겠다고 키세가 제지해왔다. 키세가 가볍게 이마를 누르자 느껴지는 서늘하고도 기분 좋은 감촉에 쿠로코는 비로소 물수건이 제 이마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원함의 정체는 이것이었던 모양이었다. 힐끔, 제 몸을 내려다보자 운동복이 걸쳐져 있는 것 또한 보였다. 아마도 키세의 것인 듯 했다. 몸이 식어서 감기에라도 들지 않게 배려한 것일까. 이미 감기에 걸렸으므로 무의미하기는 하지만 의외로 섬세한 남자다. 평소 키세를 귀찮은 멍멍이 정도로만 보았던 쿠로코는 그를 조금 다시 보았다.

 

 "…실례했습니다."

 "농구선수- 아니, 운동선수가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다니, 농구를 잘하고 못하고 이전에 기본적인 마음가짐과 자세 문제입니다, 이거."

 "……."

 

 따끔하게 나무라는 목소리는 아카시 못지 않게 엄격했다. 평소 서글서글하게 농담이나 장난을 걸어올 때와는 전혀 달랐다.

 

 "초조해 한다고, 무리한다고 느닷없이 없던 게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달리 변명할 말도 없어 쿠로코는 침묵을 지켰다. 아까 무모한 짓을 했던 건 열이 올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던 탓이 크지만, 어쨌거나 해버린 건 해버린 거다.

 

 "체력을 기르고 싶었다면 감독이나 코치와 상담해서 체계적인 메뉴얼을 짜야죠. 이런 주먹구구식으로는 될 것도 안 된다고요."

 

 말한 적도 없고, 표현을 한 것도 아닌데 다 알고 있었던 것일까. 쿠로코는 키세에 대한 평가를 조금 더 위로 올렸다. 평소엔 깃털처럼 가볍지만 사회생활을 일찍부터 시작한 탓인지 의외로 관찰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전술 쪽도 마찬가지. 쿠로코의 미스디렉션은 팀을 살리는 기술이니까, 혼자서 연습하는 것보다 팀이서 다함께 해야죠."

 

 말이 길어진 건 평소 쿠로코를 존경하고 있기 때문이다. 1군의 무식한 훈련에 매일 파김치가 되어 돌아가면서도 게으름 부리는 일 하나 없이 성실하게 연습하는 그를 보면서 감탄하기도 많이 했다. 뭐든지 쉽게 손에 들어와 적당히 살아온 기억밖에 없는 키세로서는 그런 순수한 열정이 빛나 보였다. 그림자를 자청하는 쿠로코지만 사실 테이코에서 제일 빛나는 건 그라고 생각한다. 쿠로코에게는 다른사람들에게는 없는 무언가가 있다.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저도 마음이 뜨거워진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지금과 같은 약한 모습을 보면 어쩐지 좀 안타깝다.

 

 "그러니까-."

 

 키세는 한참 열변을 토하다 평소 따박따박 대꾸하던 쿠로코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자 뒤늦게 흠칫했다. 지나치게 열을 올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 아무튼 다음부터는 조심하란 소립니다."

 

 그러자 비로소 쿠로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충고 감사합니다."

 

 쿠로코의 입가에 미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순간 키세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아, 경기에 이긴 것도 아닌데 저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이럴 때도 웃는구나. 웃으니까 안 그래도 빛나던 게 한층 더 빛나보인다. 평소에도 좀 더 웃으면 좋지 않나. 왜 항상 그 시큰둥한 무표정을 유지하는 거지. 아, 물론 그건 그것대로 남자답지만. 어느 때든,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지 간에 쿠로콧치는 사---.

 

 "…세 군. 키세 군?"

 "예, 예?"

 

 쿠로코의 부름에 핫, 하고 정신을 차리면서도 키세는 기겁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목덜미에서부터 열이 확 치솟으면서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본심을 자각하는 순간,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뛰기 시작했다.

 

 "…키세 군이야말로 더위 먹은 건가요? 얼굴이 빨간 거 같은데요."

 "그, 그럴리가요!? 아무것도 아님다, 아무것도!"

 

 키세는 필요 이상으로 펄쩍 뛰면서 당황했다가, 뒤늦게 이건 이것대로 굉장히 이상하게 보이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보다 혹시 몰라서 일단 집에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안 받던데요."

 

 그 말에 쿠로코가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자고 있는 사이에 빼갔는지 키세가 그의 핸드폰을 쥐고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지금 집에 아무도 없어서 그렇습니다. 효도관광 가셨어요, 할머니하고."

 "아, 그럼 데리러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검까? 그럼 제가-."

 "아뇨, 괜찮습니다.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이 이상은 과하다. 딱 자르는 말투는 이미 평소의 쿠로코였다.

 

 "오늘은 정말 감사합니다, 키세 군. 다음에 음료수라도 쏘겠습니다."

 "그럴 것까지는 없- 이 아니라, 네, 사주세요! 기왕이면 마지바에서!"

 

 자각한 계기도, 그 상대도, 너무 터무니없어서 황당할 지경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좋은 기회를 눈 뜨고 놓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키세가 묘하게 흥분하면서 힘차게 말하자 쿠로코는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면서도 성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겠습니다. 그럼 내일 보죠."

 

 그 말에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앉아서 내일부터 이 주체 못할 감정 안고 어떻게 쿠로코를 마주하면 좋을까, 하염없이 고민했을 뿐.

 

 키세 료타, 열 다섯의 여름.

 

 그는 첫사랑을 만났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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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은 어째 평범한 키세키즈 일상물.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아직 아이들 관계성이나 캐릭터성이 확실하게 잡힌 건 아니라서 좀 길게(?) 써보았다. 아카시는... 등장시킬까 하다가 아직 파악이 덜 되서 일단 보류-_-; 모모이는 넣고 싶었는데 쓰다보니까 애매해져서 뺐다. 엉엉, 모모이 귀여운데.. 딴 데 가면 역하렘 차리는 건데... 하필 히로인의 비중이 극도로 낮은...이라기보다는 0에 수렴하는 소년 스포츠만화에 등장하는 바람에 ㅠㅠㅠㅠㅠ

 

-팬북의 IF 설정을 기반으로 한 것부터, 성인 버전, 혹은 아예 패러렐 월드인 것까지. 패러디에는 다양한 버전이 많지만 내가 제일 선호하는 건 역시 농구 혹은 원작을 기반으로 한 에피소드다. 원래 원작 지상주의인 기질이 있기도 하고. 다만 존잘님들 글을 보고 있다보면 설정타령 ㅈㄲ라는 생각이 들기는 해.

 

-그런고로 당장 떠오르는 몇 가지 소재만으로 혼자서 신나게 쓰다보니까 여전히 어디가 황흑인지 잘 모르겠는 글이 탄생. 이건 아니야.. 이건. 흐극.

 

-중학생 때부터 글을 썼지만 아무리 해도 안 느는 게 있는데, 1. 개그 2. 달달.... 적절한 타이밍에 개그를 넣거나 핑크빛 분위기 만드시는 분들 보면 그저 존경스럽다. 게다가 쿠로바스는 아직 캐릭터 느낌도 제대로 안 잡혀서 더 쓰기 어렵다 ㅠ_ㅠ 몇 편 더 써봐야 확실히 잡힐 듯;ㅅ; 아니면 차라리 잘 쓰는(?) 것부터 쓸까. 끙끙끙.

 

-내 안의 쿠로코는 농구 일변도로 달리는 외골수라는 느낌. 물론 겉보기와는 다르게 늠름한 상남자인 건 덤이고. 미래 설정 중에 고등학교 고학년 혹은 대학 가서 농구를 완전히 관두는 패러디 글 많이 봤는데, 난 역시 농구를 아예 관둔 쿠로코는 상상이 안 간다. 재능과 체격 때문에 프로에 진출하지는 못 하더라도 취미로 즐길 수는 있는 거잖아. 은근히 X고집 기질이 있는 걸 보면 옆에서 누가 뭐라고 조잘대든 꿋꿋하게 계속 농구를 할 거 같다.

 

-반면 키세는 몇 갈래로 나뉜다. 뭐, 천천히 여러가지 버전을 써보려고 한다. 다만 베이스로 묘하게 삐뚤어진 부분이 있다는 건 거의 공통되지 않으려나. 사실 원작에서 묘사되는 키세 자체가 좀 그런 경향이 있기도 하고. 19권이었나 20권이었나. vs 하이자키 전을 할 때 「반반한 얼굴만 보고 들러붙었던 여자애 좀 빼앗았다고 우쭐하지 마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거라든가, 그 이전에 요센 전에서 카가미에게 충고하는 거라든가. 그 외에도 아무튼 이 녀석, 기본적으로 성격이 그다지 좋지는 않구나, 하는 느낌이 팍팍 드는 대사가 많다고나 할까. 처음 쿠로코나 하이자키한테 만났을 때 대놓고 시비 터는 걸 봐도 그렇고.

 

키세가 멍멍이스럽게 나올 때가 많은 건, 역시 그 주위의 인물들이 키세 자신의 인정을 받은 인물들이기 때문이겠지. 소위 말하는 ウチソト가 분명한 캐릭터랄까. 뭐, 내 해석은 그렇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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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테리아

[황흑] Captivated

KRBS 2013.11.09 00:00

[황흑] Captivated

 

 "인사해라, 오늘부터 네 교육 담당이니까."

 "에?"

 

 처음엔 말의 의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

 

 두번째로는 유령처럼 슬그머니 나타나 인사하는 목소리에 기겁했다.

 

 "뭐야, 언제부터 거기있었던 겁니까!?"

 "조금 전부터 있었는데요."

 "아니 그보다 교육 담당이라니, 뭡니까 그건!? 애초에 누가 하는 건데요!?"

 "접니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이 당황스러워하든 말든 덤덤히 대꾸하는 그 모습에 순간 키세는 말문이 막혔다.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런 녀석이 1군? 생긴 건 딴죽이나 걸 게 생겼는데? 게다가 뭐야, 왜 이렇게 존재감 없어!  

 

 -혹시 1군 승급 기념 몰래 카메라는 아닐까. 키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

 

 심히 애석하게도, 쿠로코인지 뭔지 하는 존재감 없는 녀석이 교육 담당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그를 얕보았던 첫판단에 그리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늦은 오후, 오늘도 테이코 제1체육관의 코트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가운데서 무서우리만치 존재감이 없는 소년이 운동 선수라기에는 가는 팔이 있는 힘껏 쭉 뻗었다.  

 

 그리고 오늘도 변함없이 탕,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맥없이 떨어졌다.

 

 '아-아, 또냐.'

 

 데구르르, 공이 코트에 힘없이 나뒹굴었다. 도대체가 림 안으로 공을 통과시키는 법이 없다. 불쑥불쑥 나타나 사람 놀래는 일은 잘하는 주제에, 왜 저런 간단한 것도 못하는 걸까. 아니, 기본적으로 슛을 못하는 녀석이 왜 1군 레귤러에 있는 거냐고. 몸치인 너도 할 수 있습니다 농구교실, 뭐 이런 데 다녀야 하는 거 아냐?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가 전중全中 최고라는 사실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 실제로 1군을 제 눈으로 직접 목도하고 나니 그게 부풀려진 헛소리가 아님도 알겠다. 처음 봤을 때부터 과연 따라잡을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던 아오미네부터 시작하여 아카시, 미도리마, 무라사키바라 등 아무튼 대단한 녀석들 뿐이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면 그동안 잊고 살던 짜릿한 고양감이 전신에 흐른다. 백전백승이라 했던가. 자신감 넘치다 못해 오만하지만 테이코에게는 더할나위없이 잘 어울리는 모토다.

 

 딱 한 명만 제외하면.

 

 탕, 다시 공이 림을 두드리면서 튕겨져 나갔다. 오늘만 해도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성공한 적이 있기는 하나. 이쯤되면 창피할 만도 한데, 특유의 무덤덤한 안색은 바뀌는 법이 없다는 게 더욱 기가 막힌다. 저런 한심한 녀석이 자신의 교육담당이라니, 언어도단이다. 인정할 수 없다. 몇 번이고 항의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아오미네의 뒤통수 가격뿐이었다.

 

 키세는 마뜩찮은 눈으로 잠시 쿠로코를 쳐다보다가 끝내 제 앞까지 굴러온 공을 집어들어 휙 던졌다. 공은 유려하게 날아가 림 안으로 정확히 빨려들어갔다.

 

 

 

 "다른 취미 알아보는 게 낫지 않습니까?"

 

 뜬금없이 날아든 말에 일순간, 공을 정리하던 손이 멈췄다. 둘만 남은 체육관에 잠시간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앞뒤 뚝뚝 잘라먹었는데도 쿠로코는 키세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들었다. 쿠로코는 몸을 바로하고 키세를 응시했다. 키세는 여상스럽게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드리워진 음영 때문인지, 아니면 날이 바짝 선 본심 때문인지, 그리 호의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뇨, 농구가 좋습니다."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매끄럽게 대답했다. 키세는 더욱 심사가 뒤틀렸다.아 그야 좋아는 하겠지. 좋아는. 보면 안다, 그런 건. 그렇게 못하면서도 꿋꿋하게 하고 있으니까. 근데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잖아.

 

 "1군에는 어떻게 올라온 겁니까?"

 "노력했습니다."

 

 노력한 게 그 정도라면 더더욱 절망적이다.

 

 "노력했다고 1군에 올려보내줄 정도로 테이코 방침이 호락호락해 보이지는 않은 거 같던데요. 감독이나 다른 사람들이 아무 말 없는 건 역시 '그런 이유'가 있어섭니까?"

 

 앞뒤 끊어먹는 화법은 여전하지만 이번에도 쿠로코는 그 뜻을 알아들었다. 당장 얼굴을 붉히면서 멱살을 잡아도 시원찮을 판이었지만 쿠로코는 같은 말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키세 군이야말로 빠른 속도로 1군에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그야 별 거 아니니까요, 농구."

 "…아무렇지도 않게 자랑하시네요."

 "테이코라 해도 2군은 역시 그 모양이니까요. 능력 있는 제가 1군에 올라오는 게 그다지 이상한 거 같지는 않은데요."

 

 키세가 정리하다 만 농구공을 손 끝으로 돌리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가 농구를 시작하여 1군에 올라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주였다. 다들 이례적인 일이라고 놀라워했지만 정작 본인은 매번 주위에서 그렇게 호들갑 떠는 게 귀찮았다. 뭔가 원하는 것이 뜻대로 손쉽게 손 안에 굴러들어오는 일은 그에게 숨쉬듯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쉬운 걸 못 하는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우습게 보일 정도다.

 

 -이를테면 눈 앞의 소년과 같은.

 

 "너무 잘하는 것도 시시하지만 못하는 건 더욱 시시할 텐데, 잘도 하고 있네요."

 "슬슬 서둘러 정리하죠. 할머니가 혼자 기다리고 계셔서 가봐야 합니다."

 

 키세가 다시 강하게 도발해왔지만 쿠로코는 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고 다시 뒷정리에 몰두했다. 딱히 불쾌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정말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셔서, 그리고 더 대화할 가치를 못 느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한 모습이었다.

 

 맘에 안 드네, 진짜.

 

 주제파악하게 해서 교육담당인지 나발인지 관두게 하려고 했는데, 저 태도로 봐선 글러먹었다.얼굴에 철면피를 깔았는지 어쩐지 꼼짝도 안 한다. 젠장, 아오미네한테 하나라도 더 캐물어서 실력을 길러도 부족할 판에 저런 유령 같은 녀석한테 붙들리다니, 이게 뭐야. 

 

 키세는 한숨을 내쉬었다.

 

*

 

 그 뒤로는 쿠로코에게 신경쓸 틈이 그다지 없었다. 같은 1군의 선배격인 하이자키 덕분이었다. 적당주의에 연습도 설렁설렁 하지만 실력만큼은 제법 되는, 재능있는 녀석이었으나 하는 짓 하나하나가 시비조라 굉장히 거슬렸다. 덕분에 열을 올릴 대상이 하이자키로 옮겨갔고, 쿠로코와는 한동안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연습 시합이 성립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2군 시합… 그것도 이 콩나물 유령 같은 녀석하고 말입니까!?"

 "말 조심 하랬지, 누가 콩나물이야!"

 아오미네가 버럭 소리 지르면서 뒤통수로 날아든 농구공의 감각도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당황한 탓이다.

 

 "왜 1군이 2군 시합에 나가는 건데요?"

 "테이코 전통인 거다."

 "게다가 지면 2군 강등이라니…."

 "마찬가지로 우리 방침이다. 테이코의 유일무이한 모토, 그건 승리니까."

 "……."

 

 그렇다면 보다 제대로 된 선수를 내려보내는 게 마땅한 게 아닐까. 저 녀석은 발목이나 안 잡으면 다행일 거 같은데.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옆모습을 보면서 키세는 불만스럽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좀 위험하다.

 

 상대편 선수가 기분나쁜 히죽거리면서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키세는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아냈다. 

 

 -유니폼 걸고 점수 내기 하지 않을래요?

 -싫습니다. 그보다 지면 어쩌려고요?

 

 경기장으로 오는 길에 쿠로코가 그리 말했을 때는 솔직히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번에 2군이라고 얕보기는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테이코 2군은 만만하지 않다. 거기에 그 자신까지 있으니 질리가 없다고 마음 속 어딘가에서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백한 파울에도 호루라기가 울리지 않는다. 한 두번이면 심판의 자질이 별로인가 할 텐데, 아무래도 이건 고의적으로 눈을 감아주는 것 같다. 경기 시작하기 전부터 주의산만하게 쏟아지는 야유도 그렇고, 고작해야 연습시합일 뿐인데 참 열정적으로 한심하게 방해질이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기고 싶을 정도로 테이코의 위상이 높았나- 하고 우쭐하고도 싶지만 사실 그러기에는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

 

 아무리 연습 시합이라지만 패배, 그것도 이런 식으로 기분 더러운 패배는 딱 질색이다. 특히나 2군 강등 건이 걸려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약간 초조해하고 있을 때였다.

 

 "테이코 선수 교체, 15번, 쿠로코 테츠야."

 "뭐…."

 

 메마른 버저음에 이어진 교체 선언에 키세는 당황했다. 가뜩이나 점수를 뒤지고 있는데 슛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 하는 무능력 선수를 들여보내 뭘 어쩌자고?  

 

 선수가 교체되자마자 다시 경기가 재개되었다. 혹시나 하고 쿠로코 쪽을 살펴보았지만 예상대로 제대로 된 움직임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점수 내기를 거절했던 것도 납득이 간다. 애초에 점수 내기는 하려야 할 수가 없었겠네. 오죽하면 상대방조차 무시하고 아무도 마크하지 않을 정도-

 

 '……아니 잠깐, 뭔가 이상한데?'

 

 아무리 방심하게 생겼어도 그렇지, 상식적으로 코트 위에서 뛰고 있는 적이 노마크라는 게 말이 되나? 잠시 사고가 멈췄던 찰나,

 

 "어, 어?"

 

 휙, 어디선가 공이 날아들었다.

 

*

 

 연습 경기 후반은 전반의 부진이 무색할 정도로 손쉽게 흘러갔다. 득점으로 연결될 수 있는 선수에게 적재적소로 날아드는 쿠로코의 마법같은 패스 덕분이었다.

 

 미스디렉션Misdirection이라고 했던가. 쿠로코 본인 특유의 희미한 존재감을 살린 기술이라고 했다. 상대방의 주위를 딴 데로 돌려 공을 스틸하거나 패스하는 거라던가. 원리는 들었지만 역시 믿겨지지 않을 만큼 대단하다.

 

 '존재감이 없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건.'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자꾸 실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오미네를 우연히 보았을 때 오싹 소름이 돋고 전신에 아드레날린이 돌았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내려다봤던 상대가 경기의 흐름을 이쪽으로 끌고 와줄 때의 그 전율이라니. 그 감정을 뭐라 불러야 좋을까. 존경심?

 

 "쿠로콧치, 진짜 수고했습니다."

 

 조금 앞서가는 쿠로코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으면서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쿠로콧치. 묘한 호칭에 쿠로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치?"

 "아, 전 존경하는 사람에게는 ~치를 붙여 부릅니다."

 "기분 나쁘니까 그만둬주세요."

 

 경기 시작 전까지만 해도 유니폼을 걸고 내기를 하네, 마네 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근사근하게 웃으면서 친한 척하니까 적응 안 된다. 쿠로코가 딱 잘라 거부했지만 키세는 계속 들러붙으면서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쿠로콧치, 그런 걸 숨기고 있었다니 반칙이잖아요."

 "숨긴 적 없습니다. 반칙은 더 아니고요."

 "같은 팀메이트니까 그런 건 좀 진작에 알려줬으면 좋았을 건데요."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엑, 하지만 전 몰랐다고요!"

 "그랬나요."

 

 쿠로코가 시큰둥하게 대답하면서 키세를 떼어내버리려는 듯 걸음을 빨리했다. 그 노골적인 냉대에도 키세는 홀린 듯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저 작은 뒷모습이 이렇게 멋있었을 줄이야.

 

 젠장, 멋모르고 처음에 그렇게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키세는 이제와서 후회했다. 이래서야 저에 대한 첫인상이 0점, 아니 지하를 뚫고 바닥을 향해 치닫고 있을 게 아닌가.

 

 '크으, 실수했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키세는 기가 죽지는 않았다. 이래봬도 사람에게 호감 사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몸이다. 분명 얼마 안 가 쿠로코도 제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줄 게 틀림없다. 이 정도 실점쯤이야 단박에 만회해주겠어.

 

 다소 근거없는 자신감을 내세우면서, 키세는 어느새 저만치 가고 있는 쿠로코를 향해 뛰어갔다.

 

"쿠로콧치, 같이 가요! 제가 바닐라 셰이크 쏠테니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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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놓고 비워두면 좀 허전하니까 급한대로 첫 글 연성! 황흑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사실 심리 묘사 몇 가지 추가한 것 외에는 원작 스토리를 따라가고 있기에 아무 것(?)도 없긴 하지만 일단은 이건 황흑이라고 우겨본다.  

 

-아무튼 그런고로 즉석에서 손 가는 대로 휘갈겨 쓴 거고 맞춤법 검사도 안 한, 초벌구이(?) 상태. 사실 중간에 좀 더 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이를 테면 하이자키한테 져서 키세가 분해하며 연습하는 걸 보면서 쿠로코가 슬쩍 한마디 한다든가!- 우선은 빨리 올리고 싶어서 생략.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뭐 쿠로바스 패러디는 처음 써보는 거니까 우선 느낌만 잡아보는 걸로.

 

-하도 오랜만에 써서 그런지 이 짧은 글에 3시간 이상 걸렸다 orz orz

 

-쿠로바스 황흑 패러디 보면 온갖 타입들이 다 있지만, 난 역시 Fall into love 계기는 저 2군 연습시합이 맞다고 본다. 이건 원작공인이야 자신과는 전혀 다른 타입의, 이전에는 도대체가 뭐가 장점인지 알 수 없었던 소년이 시합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

 

 쿠로코는 늘 제 자신을 그림자라고 자청하고 있지만 실은 기적의 세대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빛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느낌이다. 이를 테면 태양이 있음으로 인하여 빛나는 달처럼. 

 

-아니 근데 진짜 아무리봐도 황>>>흑은 원작공인인 거 같다(???) 대사 하나하나가 주옥같아. 내가 어지간하면 소년만화 BL 패러디 잘 안 보는데, 이건 뭐 떡밥을 팍팍 던져! 특히 드라마CD! 나 진짜 들을 때마다 뿜는다곸ㅋㅋㅋㅋㅋㅋㅋ그러니까 부디 더해주세요!(넙죽)

 

-그나저나 키세의 ~ス 말투를 ~슴다로 번역하는 걸 많이 봤는데, 으음, 대응되는 말이 없으니까 고육지책으로 쓰는 건 알겠지만 역시 조금 느낌이 다르다고나 할까; 특히 진지한 이야기할 때는 더욱 안 어울리고 해서 일단은 평범한 존대로 처리했는데, 막상 쓰면서 보니까 그냥 ~슴다체로 쓸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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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테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