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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2.12 [황흑] 연과 연 사이 #01 -1차 수정

緣과 戀 사이 - 센티넬버스AU

 

1.

 

툭, 투둑.

 

예고에 없던 소나기가 내렸다. 한 두 방울 떨어지는가 싶더니 부지불식간에 물줄기가 쏟아졌다. 눈이 아닌 비였다. 매서울 겨울추위가 한풀 꺾였다는 실감이 나는, 시원시원한 소리였다.

 

한창 매대를 정리 중이던 쿠로코는 바삐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추고 허리를 펴 진열대 너머를 바라보았다. 전단지 따위로 반쯤 가려진 창 위쪽에 쉴 새 없이 빗방울이 맺혔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쉬이 그칠 비처럼 보이지 않았다. 쿠로코는 좀 더 눈에 힘을 주고 그 밖을 내다보았다. 편의점 바깥을 지나다니는 사람의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손님이 적겠구나.

 

쿠로코는 쉽게 판단을 내렸다. 원래부터가 학교도, 학원도 없는 한가한 주택가라 목이 안 좋은 편의점이다. 이래서 이익이 날까 싶을 정도로 손님이 적었다. 거기에 이런 비까지 오면 더욱 집에서 나오지 않으리라. 위치를 고려해볼 때 급하게 우산을 사러 오는 사람 또한 드물 테니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한가하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좀 불편했다. 고작해야 아르바이트생이 사장 걱정하는 건 과한 오지랖이라 하겠지만 이 편의점 사장은 조금 특별하다. 고등학교 동창이며, 그 후로도 꾸준히 인연을 이어온 절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농구 하나만으로도 평생 먹고 살만한 톱클래스 선수이기는 하지만 제 나름대로 은퇴 설계하겠답시고 차린 가게가 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얼마 후에 있을 밸런타인데이 때 좀 팔리면 좋으련만. 오늘 팔린 거라고는 어린 꼬마아이들이 사간 과자 몇 봉지와 낮술하는 어떤 중년 남자가 사간 맥주 몇 캔, 평소 도시락 사러 자주 들락날락하는 남중생이 엄청 창피하다는 얼굴로 누나인지 여동생인지 모를 여자형제(추정)의 생리대를 사간 게 다였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죽을상을 하고 있던 게 떠올랐다. 검은색 봉지 혹은 안 보이는 걸로 싸달라고 했는데 때마침 있는 게 투명한 것뿐이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생리대를 누가 보지 못하도록 신줏단지 모시듯 꼭 껴안고 뛰쳐나가는 게 좀 안쓰러웠다. 그게 그렇게까지 창피한 일인가 싶었지만 제 기억을 돌이켜보면 원래 그맘때가 한창 섬세했던 것 같기도 하다.

 

“후우.”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도 꽤 늦장을 부렸다고 여겼지만 정리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마 애초에 팔리거나 손님이 손댄 흔적이 적기 때문이리라. 비슷한 이유로 매장 안은 시간마다 바닥을 문지르지 않아도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또 할 일이 뭐 있던가. 적당히 틀어놓은 유행가만이 시끄럽고 적요하게 울리는 가운데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으아, 갑자기 웬 비야…….”

 

젊은 남자가 급하게 뛰어 들어오더니 살짝 혀를 찼다. 분주하게 모자며 코트 따위를 털어내는 손길로 미루어보건대, 물건을 사러 들어왔다기보다는 소나기에 놀라 대충 눈에 보이는 가게에 들어온 것 같았다. 비난할 건 아니었다. 적어도 우산은 사줄 테니. 그래도 닦은 지 얼마 안 된 바닥이 진흙과 빗물로 얼룩진 것에는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남자 또한 쿠로코의 눈길을 알아차렸는지 제 발밑을 흘낏 바라보았지만 저는 손님이니 당당하다는 듯 미안한 기색은 없었다.

 

쿠로코가 대걸레를 집어 들어 얼룩진 바닥을 닦고 입구에 깔판을 까는 동안 남자는 1회용 비닐우산 하나와 물 한 병을 집었다. 바코드를 찍자 관광 기념품 엽서에나 어울릴 법한 대자연의 풍경으로 포장하고 있는 K 브랜드의 물 가격은 무려 450엔(세금 제외)이었다.

 

쿠로코는 조금 놀랐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퍼온 것도 아닐진대 물 주제에 뭐가 이렇게 비쌀까. 아니 그보다 잘 안 팔려 냉장고 뒤쪽에 있었을 것을 용케 알아본 것도 대단했다.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도 가게 한 구석에 이런 게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돈 주고 사먹겠다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신기한 마음에 남자를 슬쩍 올려다보자 -키가 제법 아니, 상당히 컸다- 불쾌한 건지 모자를 한층 눌러쓰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무언의 항의인 거 같아 쿠로코는 그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신속히 계산을 진행했다. 분위기로 보건대 동네 사람도 아니고 방문객인 거 같은데, 괜한 오지랖을 자랑했다 시비가 붙어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봉투는 20엔입니다. 필요하신가요.”

 

남자는 대답 없이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네, 다해서 980엔입니다.”

 

남자가 재빠르게 내민 건 2만 엔이었다. 980엔어치 사고 2만 엔이라니, 좀 쳐다봤다고 시위하는 건가. 그보다 2만 엔짜리가 아직도 남아있나. 쿠로코는 약간 기가 막혔지만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제 특기를 살려 내색하지 않고 능숙하게 잔돈을 거슬렀다.

“2만 엔 받았습니다. 거스름돈 19080엔입니다.”

 

모 남중생을 슬프게 했던 투명 봉투에 페트병을 담고, 비닐우산을 남자 쪽으로 밀면서 거스름돈을 건넸다. 찰나동안 손과 손이 스치면서 지폐 6장과 동전 두 개가 남자의 손바닥 위에 얹혔다. 이것으로 오늘의 4번째 손님도 마무리다.

 

“들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마무리였어야 할 터였는데.

 

“…….”

 

남자는 돈을 손에 쥔 채 미동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선을 피하듯 숙이고 있던 얼굴도 똑바로 들어올렸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지 미미하게 흔들리는 눈에는 좀 전까지 보였던, 다소 신경질적인 기색은 전혀 없었다.

 

혹시 계산이 잘못됐나?

 

맞게 한 거 같은데. 갸웃하면서도 우선 손바닥 위를 확인했다. 남자의 시선도 함께 따라왔다. 머리 위쪽에서 미약한 바람이 일었다. 머리카락 끝이 살짝 흔들렸다.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지만 뭔가 말한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어요. 되물으려던 찰나,

 

“어…….”

 

손을 붙잡혔다.

 

10엔짜리가 쩔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지폐가 한낱 종잇조각처럼 흩어졌다. 제 팔목을 쥐고 있는 손아귀의 힘은 낭떠러지에서 구명줄이라고 쥐고 있는 양 강하고, 억셌다. 쿠로코는 순간적으로 당황해 아무 말도,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남자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와 팔을 더듬거렸다. 남자의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

 

미간을 좁히며 항의하려다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남자는 감정이 둑에서 터진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탓이다. 그것이 어디선가 본 듯 낯설지 않았다. 기억이 삽시간에 십여 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갔다. 쿠로코 제 어머니가 운영하던 유치원에서 다니던 원생이 길을 잃어 미아가 되었던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 날도 이렇게 예보에도 없던 비가 왔었고, 한술 더 떠 천둥번개까지 쳤다. 아이는 갑작스런 비와 천둥소리에 놀랐는지 놀이터 미끄럼틀 밑에 숨어 떨고 있었다. 3시간 동안 온 동네를 뒤져 간신히 찾았던 그때 그 아이가, 지금 이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탓이었다. 저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흘러나온 것은.

 

“……괜찮습니까?”

 

조심스럽게 건넨 말이 신호탄이 된 듯 남자가 무너지듯 쿠로코의 팔 끌어안으며 얼굴을 묻었다. 괜찮아요? 어디 아픈 데라도 있습니까? 쿠로코는 다시 물으면서 무심코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예전 어느 날, 겨우 홀로 남겨진 공포에서 벗어나 익숙한 품속에 달려들었던 아이를 꼭 끌어안아주었듯이. 이대로 영영 길을 잃을까 무서워서 목 놓아 울지도 못하다, 겨우 눈물을 흘릴 수 있던 그 아이에게 그리 해주었듯이.

 

이제 스피커에선 붉은 실의 인연처럼, 운명처럼 만나게 된 연인에 대한 사랑노래가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2.

 

2/9일. 물병자리 오늘의 운세. 일 년에 몇 없는 액운이 끼었음. 어지간히 급한 용건이 없으면 집에 있을 것. 분홍색 머리띠를 착용하면 악운이 다소 상쇄될지도.

 

평소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신문 별자리 운세란을 읽어본 건 오늘따라 아침 일찍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밀린 집안일을 마치고도 얼마간 시간이 남았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벌이기에는 애매했다. 해서 평소에는 넘어가던 신문의 연예란이며, 그 밑의 운세란까지도 탐독한 것이었는데, 재수가 없어도 지지리도 없는 운세가 쓰여 있었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딱히 운세니 별자리 하는 걸 믿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집을 나서서 큰 도로로 향하던 도중 지각한 어느 고교생의 자전거에 치일 뻔 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만원 지하철 안,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아저씨가 옆에 있던 여대생과 착각해서 엉덩이를 더듬었을 때는 그냥 재수가 안 좋은 거라고 여겼다.(물론 그 반쯤 벗겨진 대머리에게는 분노의 응징을 가했다.) 학교에 도착해서 반쯤 쓴 레포트를 마저 완성하려고 USB를 찾다 그걸 집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을 땐 오늘의 운세니 별자리니 하는 걸 믿는 사람들의 심정이 조금 이해가 갔다.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에 도착해서 정산을 맞추는데 안 맞는다는 걸 알았을 때는 ‘오늘의 운세’님 말대로 집에서 쉬는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는 후회가 살짝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오늘 최대의 액운이 들어서는 순간, 쿠로코는 머리를 짚었다.

 

“저 왔어요, 쿠로콧치!”

 

순순히 운세를 따라 집에 틀어박혀서 쉬어야 했다. 꾸역꾸역 나올 거라면 그냥 오늘 하루 미친 척 분홍색 머리띠를 해야 했다. 꽃같이 웃는 키세를 보면서, 쿠로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

 

남자의 울음소리는 20여분이 지나서야 간신히 잦아들었다. 한참 들썩이던 남자의 어깨가 겨우 진정되자 쿠로코는 슬그머니 떨어졌다. 하도 서럽게 울어서 저도 모르게 옛 직업(?)정신을 발휘해 달래긴 했는데 상당히 어색한 상황이었다.

 

“정말 어디 아픈 건…….”

“예? 아, 아뇨, 아뇨, 괜찮아요, 진짜로요.”

 

뜻밖의 사태이긴 했지만 당황은 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일하다보면 의외로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게 된다. 규모가 작고, 구석진 곳에 있으면 그 빈도수는 다소 줄어들지만 어쨌거나 정기적으로 독특한 사람들과 맞닥뜨렸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경력 3년차, 직무유기 중인 사장의 업무마저 대리로 처리하면서 어지간한 경우는 겪어보았다. 뜬금없이 우는 사람도, 울면서 들어오는 사람도 의외로 있는 편이었다. 늦은 밤, 혹은 새벽이 아니라 대낮이라는 점이 다소 특이하긴 하지만, 반쯤 빈 술병을 들고 편의점을 무료상담소로 착각한 양 찾아오는 만취객보다는 백 번 낫다.

 

“저기, 제가…… 흐,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라…….”

“네, 그렇겠죠. 일단 물이라도 마시는 게 어떤가요.”

 

뒤늦게 부끄러워진 건지 황급히 눈가를 닦아내는 남자에게 쿠로코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자가 산) 물병을 따서 건넸다. 혹시 누구한테 차이기라도 한 걸까. 제일 그럴듯한 가설을 떠올렸다가 이내 취소했다. 눈물범벅에, 붉은 기까지 올라왔지만 남자의 얼굴은 한눈에 봐도 말끔한 상이었다. 누구를 차면 찼지, 차일 얼굴은 아니었다. 사연이 조금 궁금했지만 남자는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두어 달쯤에 왔던 30대 초반 남자에게서처럼 어장관리 당한 이야기 비슷한 레퍼토리를 들을 일은 없어보였다.

“실례했어요.”

“괜찮습니다.”

 

의례적인 말을 주고받으며 남자는 쿠로코의 가슴께에 있는 명찰을 주목했다. 쿠로코 테츠야. 남자는 속삭이듯 쿠로코의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중얼거렸다.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개인편의점이라 이름을 알아봤자 친절 사원으로 칭찬할 수도 없을 텐데. 쿠로코는 제 이름을 알려는 남자의 의도를 어림짐작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쿠로코 테츠야.

 

한숨처럼 남자의 입술 사이로 다시 이름이 흘러나갔다. 남자는 시름어린 얼굴로 쿠로코의 얼굴과 명찰, 그리고 제가 꼭 붙들고 있던 손을 차례대로 훑다가 이를 악물며 홱 몸을 돌렸다.

 

“……또 올게요.”

 

흔한 인사치레라 생각했다. 빠르고, 들릴 듯 말 듯 내뱉은 작은 데다 머뭇거림이 잔뜩 묻은 목소리가 그 반증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당연한 일이다. 생면부지 타인 앞에서 다 큰 성인 남성이 펑펑 울었다. 보통이라면 무슨 사정이건 간에 창피해서 근처에도 다시 못 올 것이다. 하물며 기껏 산 우산도, 바닥에 흩어진 잔돈도 잊고 다시 빗속으로 뛰쳐나간 남자다.

 

다시 온다니, 설마.

 

별 사람이 다 있다고 가볍게 웃고 넘겼다. 가끔은 이 가게 주인이라는 걸 잊고 사는 듯한 사장, 카가미에게 (반강제로) 1주일간의 상황 보고를 들려주면서 지나가듯 그런 일도 있었다고 한 마디 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진심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딸랑, 문이 열렸음을 알리는 방울소리가 들렸다. 오늘의 열두 번째 손님이었다. 쿠로코는 1시간 만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을 향해 어서오세요- 하고 인사를 하다가 멈칫했다. 들어오는 사람의 낯이 익었다.

 

“안녕하세요, 또 왔어요.”

“아, 네…….”

 

펑펑 울었던 며칠 전과는 달리 남자는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그때도 잘난 얼굴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말끔한 얼굴로 웃으니까 훨씬 인물이 살아서, 흡사 TV 속 연예인처럼 보였다. 쿠로코는 이렇게 생긴 사람도 있구나, 솔직하게 감탄했다. 길 가면 열에 아홉은 돌아볼 인물이었다.

 

“우산하고 거스름돈 찾으러 오셨나 봅니다.”

 

1주일도 안 되어 다시 찾아온 손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가능성은 그것뿐이었다. 인사와 함께 미소를 띠면서도 미묘하게 어색해 하는, 혹은 곤란한 듯한 기색을 보였기에 확신했다. 쿠로코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한쪽에 빼두었던 돈과 우산을 바로 챙겨들었지만 남자는 오히려 손을 내저었다.

 

“네? 아, 그거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라면……?”

“그냥 신세졌다 싶어서요.”

 

남자는 카운터에 작은 종이가방 하나를 내려놓으면서 자연스럽게 카운터를, 정확히는 쿠로코가 가지런히 내려놓은 손을 흘끗 쳐다보았다. 남자에겐 다행스럽게도, 쿠로코는 그 시선을 눈치 채지 못했다.

 

“딱히 신세랄 것까지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애초에 남자가 졌다는 신세가 뭔지도 모호했다. 우는 동안 토닥여준 것? 보통이라면 오히려 불쾌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물을 준 것도, 남자가 산 물을 뚜껑만 열어 건넨 것에 불과하다. 쿠로코가 영문을 몰라 아리송해하자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지 않았잖아요, 제가 운 거.”

“그건…… 어쨌거나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괜찮습니다. 굳이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요.”

“별 거 아니니까 그냥 받아주세요. 사온 사람 성의가 있는데.”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선물까지 가져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남자가 꽤나 막무가내로 나오는 터라 일단 넣어두었다. 이런 일로 무의미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세상엔 이런 유난스런 사람도 있구나. 그쯤으로 여기면 되는 것이리라.

 

“그보다 여기 두고 가신 물건…….”

“딱히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적당히 화과자 사 왔는데, 좋아하세요?”

“싫어하진 않습니다. 19080엔과 비닐우산, 여기 있습니다.”

“아 다행이다. 여기 제법 맛있는 데래요. 가게 열기도 전부터 새벽같이 줄 서는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습니까. 금액은 정확한지 다시 확인해보세요.”

“반응이 어째 좀 시큰둥하네요? 실은 안 좋아해요? 아니면 뭐 다른 좋아하는 거 있어요?”

“…….”

“음, 굳이 먹을거리 아니더라도 관심 있는 거라면 뭐든 알고 싶은데요. 패션……쪽에는 그다지 흥미 없는 거 같지만, 음악취향이라든가, 취미라든가 아무튼 뭐든요.”

남자는 전혀 듣고 있지 않을뿐더러 뭔가 묘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었다. 너에 대해 뭐든지 알고 싶다니. 이미 호의를 베풀어준 직원에 대한 감사인사와는 밤톨만큼도 상관이 없는 영역이었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남자가 뭔가를 구입할 의향이 없다는 건 금방 보였지만, 일방적인 대화를 끊어내기 위해 적당히 내뱉었다. 물건에 관한 질문이면 모를까, 사적인 말을 줄줄 떠드는 걸 응대할 의무는 없다. 쿠로코는 남자 쪽으로 밀어둔 돈 봉투와 우산을 남겨두고 조용히 카운터에서 빠져나왔다. 슬슬 유통기한이 가까워진 인스턴트들을 빼내어 폐기할 시간이었다.

 

쿠로코는 제멋대로 떠들고 있는 남자를 내버려두고 일에 집중했다.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손님에서 다른 무언가로 취급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 채야 하건만 남자는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원치 않아도 귀에 들어오고, 달리 막을 수도 없다는 점이 신장개업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소음공해와 비슷했다. 더욱 안 좋은 점은 도망갈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순간, 쿠로코는 남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대체 그런 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군요.”

“그야 쿠로콧치에 대해 잘 알고 싶으니까.”

 

온도가 낮아졌음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남자는 변함없이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쿠로코는 미세하게 미간을 좁히며 반박하려다, 그가 묘한 호칭으로 저를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쿠로콧치?

 

“지금 뭐라고…….”

“와, 지금 처음으로 제 말에 대답해준 거 알아요?”

 

내가 알게 뭡니까. 살갑게 웃는 남자의 얼굴에 짜증스럽게 대꾸하려다 쿠로코는 말을 삼켰다. 저 마이페이스인 남자에게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 부르지 마세요.”

“왜요? 저 친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은 이렇게 불러요.”

“저희가 친합니까?”

“앞으로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는 있는데요.”

“말이 안 통하네요. 작작하세요. 영업 방해로 신고할 겁니다.”

“이 가게 손님 없는 거 이미 알…… 아 알았어요. 됐어요. 오늘만 날인 건 아니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냐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새도 없었다.

 

“어쨌든 우산하고 거스름돈은 챙겨줘서 고마워요.”

 

남자는 쿠로코의 손을 꼭 잡으면서 싱긋 웃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아니 분명히 손에 상당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호리호리한 주제에 제법 힘이 세서 아팠다. 쿠로코는 인상을 찌푸리며 털어내려고 했지만 그 전에 남자가 먼저 떨어졌다. 역시. 의미를 알 수 없는 속삭임이 스쳐지나갔다. 짧은 사이에 남자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지만, 저릿저릿한 손을 주무르던 쿠로코는 그를 보지 못했다.

 

“또 올게요.”

“오지 마세요.”

“아 맞다. 자기소개 안 했었죠? 키세 료타에요.”

 

기억해줘요.

 

남자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가 잔상처럼 귓전에 퍼졌다.

 

 

====

 

아.. 내가 뭘 쓰고 있는 거지... 맨날 1차만 써서 그런가. 남의 집 애들 이야기 쓰려니까 힘들다. 캐붕의 연속이라는 느낌. 2차 쓰는 사람들 굉장해...

 

14/03/09 1차 수정. 아무리 고쳐도 맘에 안 드는 건 어쩔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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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스테리아